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주성 전투 (문단 편집) === 전황을 뒤집다. === 12월 17일 아침, [[귀주성]]에 몽골군이 그간의 소규모 교전이 아닌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귀주성]]을 포위한후 남문에 포대를 수십대를 방열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박서]]와 [[김경손]]은 고려군의 [[발석거]]로 맞대응하고 성의 서문을 열고 나와 300명의 돌격대를 보내 몽골군의 측면을 쳤고, 이에 몽골군이 당황해 하며 혼란에 빠지자 [[귀주성]] 수비병력이 일제히 성밖으로 뛰쳐나와 공격을 감행, 몽골군은 퇴각했다. 이때 몽골군이 어찌나 당황했는지 오히려 자신들의 진영에 목책을 설치하고 수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蒙古復以大砲車攻之 犀又發砲車飛石 擊殺無算 蒙古退屯 樹柵以守。 >몽고가 다시 대포차로 공격하자 박서는 포차로 돌을 날려 적군을 무수히 죽이니 몽고는 퇴각해 진을 친 다음 목책을 세우고 수비했다. >---- >《[[고려사]]》 박서 열전 || [[파일:external/1000ya.isis.ne.jp/s0817-05-g02.gif|height=180]] || || 공성용 사다리, 운제(雲梯) || 1231년 12월 5일, 고려 조정은 [[회안공|회안공 왕정]]을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주둔하고 있던 안주로 보내 화친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12월 중순쯤 되었을 때 살리타이는 평주에서 포로로 잡힌 지의심, 학록, 강우창 등의 인원을 두 차례나 보내면서 회안공 왕정의 글을 전달했지만 박서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본 박서가 분노로 눈이 뒤집히며 고려의 백성들을 오랑캐에게 팔면서까지 살고 싶었냐는 일갈과 함께 '''그 자리에서 전원 참수해버리고 참수한 자들의 목만을 살리타이에게 돌려보내면서 항전의사를 표명함'''으로서 박서는 성을 굳게 지킬 뿐이었다. 몽골군이 또다시 운제를 동원해 성을 공격하자 박서가 대우포(大于浦)로 모조리 박살내버려 성에 접근할 사다리가 없어 성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고려사에 "큰 칼날이 장착된 거대한 무기"라고 나온다. 파성추의 수성용 버전으로 보이는데, 운제 같은 공성병기를 쳐서 쓰러뜨리는 것이 주 목적으로 보인다. 공성탑이나 운제 같은 병기는 쓰러지면 그대로 재활용이 불가능해지며, 잔해가 공성군의 공격을 방해할 수도 있다. 이에 몽골군은 25기의 [[트레뷰셋|발석거]]를 동원해 성벽을 50칸이나 부쉈지만 박서가 쇠사슬로 그 부분을 막아냈다. 이후 몽골군의 총공격이 가해지자 [[귀주성]]의 백성 남녀노소 할거 없이 모두 나와 돌을 던져 저항하여 막아냈다. >吾結髮從軍 歷觀天下城池攻戰之狀 未嘗見被攻如此而終不降者。 城中諸將 他日必皆爲將相。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천하의 성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두루 보았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성 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다." >---- >《고려사》 박서 열전에 기록된 몽골 장수의 감탄. 이 말을 한 장수의 나이가 대략 70여 세쯤 되었다고 한다. 이정도면 [[칭기즈 칸]]을 따라 몽골 통일을 필두로 [[서하]], [[금나라|금]], [[호라즘 제국]]을 물론 심지어 [[러시아]]까지 갔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을 겪었을 베테랑이었지만 이런 말을 했을 정도니 가히 [[귀주성]]의 방어력이란 엄청났던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